바다는 때로는 잔잔하게, 그리고 때로는 격하게 파도를 몰아친다.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파도가 친다는 항상성이다. 그렇게 한 사람의 내면에 내내, 쉼 없이 존재하는 어떤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
이 소설은,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로부터 시작한다.
카밀라는 어릴 때 입양되어왔고, 그녀를 입양한 모친이 세상을 떠난 이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시인 남자친구 유이치의 권고로 자신이 기억하는 유년 시기가 담긴 물건 하나하나를 보며 글을 써나가던 카밀라는 단 하나의 사진에 대해서는 긴 글을 적을 수 없었다. 어머니일 수도 있는 여자와 자신으로 보이는 갓난아기가 찍힌 한 사진. 카밀라는 그 사진을 통해 자신을 버려 항상 비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엄마가 나를 무척이나 사랑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그 사진에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세계가 우리 생각보다는 좀 더 괜찮은 곳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진’이라는 글을 써 두었다. 그리고 그 글들은 하나의 책이 되고 이후 그 빈칸을 메우기 위한 여행을 하게 된다.
한국 진남에서 입양되어왔다는 기록에 기대어 그곳으로 간 카밀라는, 그곳으로 가기 전 자신으로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 생모를 찾기 위해 간 그곳에서, 카밀라는 어머니가 그녀를 낳고 1년 뒤 17살의 나이로 바다에서 목숨을 끊었고, 자신은 어머니와 그녀의 오빠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듣게 된다. 카밀라는 이 일을 듣고 난 후 검은 바다에 뛰어든다. 그리고 그녀는 바다에서 죽은 어머니와 재회한다. 상상인지, 실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바다 속에서 카밀라는 열일곱살의 어머니 정지은과 마주한다.
「열일곱살에 미혼모가 된 뒤, 바다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소녀를 생각해야 하는 건 나였다. 나라는 존재, 내 인생. 엄마가 나를 낳아서 내가 존재할 수 있었다면, 이제 내가 엄마를 생각해서 엄마를 존재할 수 있게 해야만 한다.」 - 본문 중
「그러다가 나는 마침내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 그 소녀가 가장 간절하게 생각하는 건 바로 나일 것이라는. 바다 안에서, 죽음 속에서. 그렇다면 그 소녀를 가장 간절하게 생각해야만 하는 사람 역시 나여야만 한다는. 거기에는 어떤 변명도 불가능했다. 나는 무조건 그 소녀를 생각해야만 했다. 그건 의무와도 같았다. 달마다 꼬박꼬박 집세를 내듯이, 제한속도를 반드시 준수하듯이 나는 그 소녀를 ‘꼬박꼬박’, ‘반드시’ 생각해야만 했다.」 - 본문 중
재희는 지훈이라는 스쿠버다이버에 의해 목숨을 건지고, 그녀는 진남에 다녀온 이후부터 카밀라가 아니라, 그녀의 어머니가 불러주고 싶어했던 이름인, 재희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녀는 지훈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를 통해 진실을 만나러 간다.
진실은 아주 느리게, 독자에게만 드러난다. 그러나 독자는 그 모든 조각조각의 이야기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결국 재희가 그 진실을 마주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진실은 그녀가 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들보다 훨씬 따뜻한 거라는 것을. 그렇기에 책을 덮고 나서도, 시리고 어두운 절망이 가득한 이야기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진실은 정지은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던 사람과 재희를 낳았고, 그녀의 모든 순간 재희를 사랑했다는 것이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 너와 헤어진 뒤로 나는 단 하루도 너를 잊은 적이 없었다.」 - 본문 중
지금은 영화감독이 된, 정지은의 친구였던, 한 명의 화자인 유진은 정지은의 일을 담담히 이야기하면서, 지은이 언젠가 말한 ‘날개’에 대해 언급한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에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그 심연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타인의 본심에 가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개가 필요한 것이죠. 중요한 건 우리가 결코 이 날개를 가질 수 없다는 점입니다. 날개는 꿈과 같은 것입니다.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것 역시 그와 같아요. 꿈과 같은 일이라 네 마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야 하나도 어렵지 않지만, 결국에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방법은 없습니다. 그럼 날개는 왜 존재하는 것인가? 그 이유를 잘 알아야만 합니다. 날개는 우리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날개가 없었다면 하늘을 난다는 생각조차 못했을 테니까요. 하늘을 날 수 없다는 생각도 못했을 테지요.」 - 본문 중
「지은이가 그 때 제게 말했어요. 너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건너갈 수 있니? 너한테는 날개가 있니? 그렇게요. 저는 말문이 턱 막혔어요. 그런 제게 지은이가 나한테는 날개가 있어, 바로 이 아이야, 라고 말하며 자기 배를 만졌어요.」 - 본문 중
겉으로 보면, 한 고등학교 소녀가 자신의 아이와 생이별을 하고 그 자신의 목숨까지 끊은 비극인데, 소설에서는 자꾸만 희망을 이야기한다.
「희망은 날개 달린 것
영혼에 둥지를 틀고 말이 없는 노래를 부른다네
끝없이 이어지는 그 노래를.
드센 바람 속에서 가장 감미로운 그 노래를
매서운 폭풍에도 굴하지 않고
그 작은 새는 수많은 이들을 따뜻하게 지켜주리니.
가장 차가운 땅에서도, 그리고 가장 낯선 바다에서도 나는 들었네.
그러나 최악의 처지일 때도
단 한번도 그 새는 내게 먹을 것을 달라고 하지 않았네.」 - 본문 중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마치 빙하가 갈라진 것과 같은 깊은 심연이 있고, 우리는 그곳을 넘어가지 않고서는 한 사람에게 가닿을 수 없다. 심연은 깊고도 넓다. 그곳은 실현되지 못하고 잃어버린 꿈들과 이루어지지 않은 욕망과 아직 식지 않은 분노와 헤아릴 수 없는 슬픔들과 스스로도 모르고 지나쳐버린 마음들이 뒤엉켜있는, 모든 빛이 수렴한 어둠뿐인 곳이다.
그곳을 넘어 마음과 마음이 닿기 위해서 작가는 오직 날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어느 날 문득 홀연히 오는 꿈과 같아서 원한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그 날개를 희망이라고도 하고, 사랑이라고도 한다. 희망은 두려움 없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사랑은 그 형체가 사라진 이후에도 그 자체로 남아있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 본문 중 (김기림 시인의 '바다와 나비')
뿌연 안개 속에서도, 검고 넓은 바다가 있더라도, 날개가 비에 젖더라도, 그 날개로 나비는 바다를 건너간다. 그래서 날개는 희망이고, 사랑이다.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에서 나온 나비처럼, 어쩌면 지은은 열일곱의 나이에, 사랑하는 딸 재희를 만나기 위해, 그 바다를 건너가고 싶어 바다로 뛰어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 그리움 속에서 결국 만났다. 재희와 지은은 그 둘 ‘사이’의 심연과도 같은 바다에서 만났고, 그 둘은 서로를 통해 새로이 존재할 수 있었다. '지은'이라는 존재를 발견하고 심연을 넘어 그녀를 만남으로서 '재희'라는 존재가 새롭게 구성되었고, 세상 사람들에게 친오빠의 자식을 낳은 것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던 '지은'은 '재희'를 통해서 사랑하고 사랑받았으며, 사랑하는 아이를 낳은 어머니로 재규정된다. 그렇게 서로는 서로의 관계 안에서 다시 만들어진다.
「‘하나’의 사이가 있다. 그것은 처음과 끝의 사이이자, 처음과 끝을 규정하며 지배하는 사이이다. 처음은 사이에서 처음이 되고 끝은 사이를 통해 끝이 된다. (생략) 하나의 사이가 둘을 결정한다. 사이 양항은 오직 하나의 사이가 있고 난 뒤, ‘ 추후’追後에 그 사이를 통해 결정될 뿐이다. 예컨대 너와 나 사이에서 너와 내가 먼저 있고, 그 다음 사이가 맺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사이’에서 너와 내가 결정된다. 너와의 사이가 없다면, 나는 나일 수도 없고, 그래서 홀로일 수도 없으며, 그래서 고독할 수도 없다. 이런 이유에서 자신과 맞대면하는 “고독”Einsamkeit은 오직 우리 사이가 깊어질 때에만 그 깊이를 더할 수 있다.」
- 하이데거의 사이 – 예술론 (김동규 지음) -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는 한 어린 소녀와 아기가 찍힌 사진이 ‘이 세계가 우리 생각보다는 좀 더 괜찮은 곳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것처럼, 부재와 단절로 시작했던 소설은, 긴 어둠 속에서 희망의 줄을 이어오며, 존재와 연결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그래서 책을 덮고 나서도, 어두운 슬픔이 아니라 지속적인 온기가 느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움은 언제나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닌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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